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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장군

돋보기/시사

by 열정과 함께 2012. 10. 2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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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장군이 있다.


 이 사람은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관동군에 근무하였다. 근무중에는 당시 중국 공산군에서 조직한 게릴라인 '팔로군' 산하의 조선인 유격부대 토벌에 참가하였다. 그의 부대는 약 100여 회의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려 최종 계급 중위로 제대하게 된다.


 이 사람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복무하였다. 6.25 당시, 국군 장교 중 제대로 된 전략 수립 능력을 가졌거나, 전술 교육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인생의 로또가 터지는데..... 6.25 당시 38선을 밀고 내려온 선봉부대는 바로 그가 토벌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팔로군 산하의 조선인들을 인민군이 흡수해서 만든 부대였기 때문이다.


 6.25 당시, 국군이 속절없이 북부 전선을 모두 빼앗긴 데는 다음의 이유가 작용했다. 1. 장비의 부족. 2. 아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적의 기동력 3. 그러한 고속 기동에 대처하기 위한 전략 수립 능력의 부재. 이 장군은 당시, 위 세가지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가 가능했던, 장성급 중에는 사실상, 유일한 한국인 이었다(물론 전쟁 말기까지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전쟁 초기에 그랬다는 얘기고 그건.....). 그 결과, 그는 한국전쟁에서 사람들이 기억할만한 대부분의 대형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게 된다.


 개전 초기, 작전 계획에 따라 부여받은 방어임무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고, 후퇴를 한 이후에도 부대 편제가 그대로 남아있었던 사단은 딱 3 개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그의 사단이었다(3개 중 한 사단은 당시 북한군의 주 공격루트에서 벗어난 곳에 주둔 중이었다). 낙동강 방어전에서는, 사단장 신분으로 일선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돌격하는 용맹을 선보이며, 미군 증권군이 도착할 때 까지 낙동강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냈다. 그의 부대는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군부대였다. 개전 초기, 국군의 전투능력이 지나치게 한심해서 아예 국군을 해체하고 미군 예하 부대로 귀속시키는 것에 대해 당당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그 정도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며, 미군 장성들도 놀랄 정도의 전공을 이뤄낸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친일파다. 내 생각에는 친일파 중에서도 상당히 죄질이 무거운 친일파다. 조선인을 상대로 토벌 작전을 벌인 부대 중에도 이 정도로 근성있는 토벌 작전을 벌인 부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람은 한국 전쟁의 명장 중 하나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것은, 그의 공을 빼고는 논하기가 힘들다.


 이 장군의 이름은 백선엽이다.






 과연 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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