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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이야기 - 링컨이 "이런 사람" 이라구?

돋보기/자유주제

by 열정과 함께 2014. 10. 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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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돌아다니다 이런 포스팅을 보게 되었다. "어떤 독재자 이야기"


허허, 그래서 누구 얘긴가 하고 보니 사진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아닌가? 그래서 쭉 읽어보는데 이건 뭐 무슨......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지라! 포스팅의 귀결도 개인적인 정치 성향 상 매우 짜증나는 방향으로의 귀결이다만 그 귀결에 이르는 내용 자체가 거의 날조 수준인지라. 이거는 이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에 글을 쓴다.




이름하야, 어느 독재자 이야기란다.



페이지 소개글을 보면 콘텐츠 불펌을 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식으로 내가 따로 공유를 하는 이유는


1. 그런 페이지의 조회수가 늘어나는데 단 '1' 만큼이라도 기여하고 싶지 않으며


2. 이런 날조물을 만들어놓고 자칭 콘텐츠라니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이런 글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정말로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다. 근대사에서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바쳤건마는 이 후대의 인간들이라는 것은 그 소중함을 깨닿지 못하고 선동질이라는 행위에 고귀한 '자유' 라는 단어를 남발하니 실로 통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블로그에 글 올리면서 추천글 같은거 해본 적 없는데. 

읽고 설득력 있는 반박이다 싶으면 공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정도의 뻘소리는 좀 반박을 해서 할 말이 없도록 만들어야 될 거 같습니다.





좋다. 그래서 어떤 점이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일단 이 글을 보고 내용별로 반박을 좀 해겠다.


슬라이드 2.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 특정 지역 재벌의 지원과 지지를 기반으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슬라이드 4. 이런 세금제도로 손해를 보는 농업 중심의 지역들은 이에 반발하여 국가탈퇴를 선언한다. 이는 민주적인 절차로 이루어졌으며 헌법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슬라이드 5. 자신을 비판하는 기업인과 언론인 시민 1만 2천명을 영장없이 체포하고 구금하였다.

슬라이드 6. 독재자는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 100여 명의 시민은 죽고 3천여 명이 부상당한다.

슬라이드 7.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한다.

슬라이드 8. 미국의 최고의 대통령을 꼽을 때 링컨은 레이건 대통령과 함께 1, 2위를 항상 다투곤 한다.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링컨은 특정 지역 재벌의 지지와 지원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나?

2. 남부는 세금 제도로 손해를 봐서 연방을 탈퇴하였나? 이게 정말 문제가 없었지만 링컨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시작했나?

3. 자신을 비판하는 기업인과 언론인, 시민 1만 2천명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였나?

4.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 100여 명의 시민은 죽고 3천여 명이 부상당했나?

5.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했는가?

6. 대통령 인기투표의 결과는?


1. 링컨은 특정 지역 재벌의 지지와 지원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나?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링컨이 당선된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해가 조금 필요하다.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1860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전임자는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이었다. 당시 대통령 후보들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존 C. 브레킨리지, 남부 민주당(Southern Democratic)

 


스티븐 더글러스, 민주당(Democratic)

 


존 벨, 연방 연합(Constitutional Union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860

정당명은 임의 번역. 영문명 참조


비슷한 이름의 당에서 출마한 사람이 두 사람 있다. 한 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민주당에서 출마한 스티븐 더글러스, 다른 한 명은 약간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남부 민주당에서 출마한 존 브레킨리지이다. 그렇다면,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 이 두 정당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존 벨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링컨 이전의 몇몇 대통령들은 시종일관 남부와 북부의 대립으로 인한 정쟁에 휘말려야 했다. 익히 알다시피, 공업 중심의 북부와 농업 중심의 남부는 정계에서 서로간에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 왔다. 그러한 정쟁에 휩쓸렸던 대통령들만 해도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링컨 이전에 적어도 12년 동안 남부와 북부는 지속적으로 대립을 해 왔다는 얘기가 된다. 앞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남부와 북부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 실패하였고, 모두 재선에도 실패했다(미국 역사를 찾아보면 이렇게 대통령들이 연달아 재선에 실패한 시기는 많지 않다. 그만큼 당시 정국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1860년의 대선에서 사단이 난다. 민주당이 분당된 것이다.


당시 민주당에서 가장 유력했던 대통령 후보는 스티븐 더글러스였다. 실제로 대통령 후보를 선발하는 1860년의 전당대회에서 스티븐 더글러스는 2위에 비해 2.5배에 달하는 득표수를 올렸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의 규칙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 위해서는 전체 표의 2/3 이상을 가져야 했고, 그는 후보로 선출되는 데 실패한다. 당시 그는 노예제를 강력하게 보호하고자 했던 의원은 아니었고(실제로 그는 연방에 새로 가입하고자 하는 주의 주민투표에 노예제 허용 불가를 맡기자고 주장했다. 캔자스-네브라스카 법 참조), 남부는 그것보다 노예제에 훨씬 더 우호적인 대통령 후보가 나오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는 북부에 속해있던 민주당원들에게는 설득력이 별로 없는 이야기였다.


결국 노예제의 극렬한 옹호자들(Fire-eaters)에 의해 민주당은 분당되었다.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로 분당되었다. 노예제를 극렬하게 옹호한 Fire eater 들에 의한 Southern Democratic, 상대적으로 노예제에 덜 옹호적인 National Democratic, 그리고 둘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러나 연방의 존속을 제일의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의 Constitutional Union 이다. 당이 두 개로 쪼개져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한데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로 쪼개졌으니 하나로 뭉쳐있는 공화당에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실제로 득표수는 아래와 같다.



 

 


 


 


 


보 이름

 에이브러햄 링컨

 스티븐 더글러스 

 존 C. 브레킨리지 

 존 벨 

확보한 대의원 수

 180

 12 

 72

 39 

전체 득표 수

 1,865,908

 1,380,202 848,019 590,901


전체 득표 수를 다 합치면 링컨이 오히려 뒤지고 세 당을 모두 합친 것에 모자라다. 물론 선거인단 수로 따지는 미국의 대통령 제도를 감안할 때 과연 민주당이 하나였어도 링컨이 이겼겠는가,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실제로 총 득표 수에서 이기고도 대통령 자리는 뺏긴 사례가 두 차례 있는데 그와 득표수를 잠시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공화당

 민주당

 1876년 대선 득표

 4,034,311

 4,288,546

 2000년 대선 득표

 50,456,002

 50,999,897

 1860년 대선 득표(가상)

 1,865,908

 2,819,122 


비율 계산 할 것도 없이 표 차이가 압도적이다. 이래도 링컨이 특정 지역의 재벌들의 지지와 지원 덕분에 당선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링컨의 당선은 당시 민주당의 사분오열에 큰 덕을 입은 것이다.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 1860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위키피디아,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860

위키피디아,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1876

위키피디아,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2000



2. 남부는 세금 제도로 손해를 봐서 연방을 탈퇴하였나? 이게 정말 문제가 없었지만 링컨은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시작했나?


앞부분은 반박을 할 일말의 가치조차도 안 느껴진다. 앞에서 선거 얘기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가 펼쳐졌는지 감이 오지 않는가. 세금 제도 하나가 그 모든 정치적 혼란기를 가져올 수 있다니, 작정하고 제도를 만들어도 그런 막장 세금 제도는 만들기가 힘들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남부가 어떻게 해서 미합중국을 탈퇴하였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춰보도록 한다.


당시 공화당의 정책은 기존에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었던 주는 상관없지만, 새로 가입하는 주에 대해서는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남부는 이른 사실상 노예제의 말살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행위로 받아들였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기는 하다. 그 누가 노예제가 시행되는 지역에 머무르려 하리오. 링컨이 당선되자마자 남부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행동에 돌입한다. 먼저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가 연방의 탈퇴를 선언하고, 미시시피, 플로리다,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가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이들 주는 노예의 비율에 따라 각각의 지역(county) 를 나누고 연방을 탈퇴할 지에 대한 투표를 붙인다. 그리고 70%가 넘는 찬성률을 얻어 연방을 탈퇴한다.


과연 이 행위는 민주적이고 헌법적인가? 사실 미국의 한 주가 연방을 탈퇴하는 것이 적합한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왔다. 헌법을 기초한 사람 중의 하나인 제임스 매디슨(미국의 4대 대통령이기도 함)은 견딜 수 없는 탄압(intolerable oppression) 이 가해진다면, 마땅히 탈퇴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no theoretic controversy). 그러나 그러한 여지가 없다면 그는 탈퇴에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또 본다면 앤드류 잭슨(미국의 7번째 대통령)은 그러한 탈퇴는 단순히 league 가 깨지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며 이는 전체 연방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헌법에 뭐라고 명확히 정해진 바 없다는 얘기다.


당대의 명사들 사이에서도 그 견해 차이가 있었으며 헌법에 명확히 정해진 바 없는 문제에 대해서 무슨 근거를 가지고 헌법적이라는지 나는 납득할 수가 없다. 심지어 상당히 지지적인 어조로 말한 매디슨 조차도 견딜 수가 없는 탄압이 가해질 때만 찬성하겠다고 했는데 과연 앞으로 새로운 주에서는 노예제 금지가 견딜 수 없는 탄압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과연 링컨이 남부의 독립을 반란으로 규정하기 위해 당시의 timeline 을 조금만 참조하겠다. 링컨, 혹은 군사 행동에 관한 것만 시간 순으로 배열한다.


1860년 11월 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연방 관리들을 체포

1860년 11월 15일. 연방 해군 대위(Lieutenant) Tunis Craven, 워싱턴 DC 에 Taylor 요새와 Jefferson 요새를 방어하러 움직인다 통보

1860년 11월 20일. 링컨은 그의 행정부는 각 주들이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관리(control)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함.

1860년 12월 4일. 대통령 뷰캐넌, 북부가 남부의 노예제에 간섭하려 하는 것을 비판. 동시에,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

1860년 12월 26~27일. Major Anderson 이 연방 병력을 Sumter 요새로 이전시킴.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이를 뷰캐넌이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것으로 해석

1860년 12월 30일. Lieutenant General, Winfield Scott, 섬터(Sumter) 요새에 병력을 증강해야 한다고 대통령(뷰캐넌)에게 요청했으나 묵살.

1861년 1월 2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병력이 Jackson 요새를 점유(take control)

1861년 1월 3일. 조지아 병력이 Pulaski 요새를 점유(take)

1861년 1월 4일. 앨라배마 병력이 Mount Vernon 을 함락(seize)

1861년 1월 5일. 앨라배마 병력이 Morgan 요새와 Gaines 요새를 함락(seize)


여기까지 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명백하다. take 까지는 평화롭게 요새를 양도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해도 seize 부터는 명백하게 전투 행위다.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위키피디아, Origins of American Civil war

위키피디아, Timeline of events leading to American civil war

위키피디아, Secession in the United States


3. 자신을 비판하는 기업인과 언론인, 시민 1만 2천명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였나?


이 부분은 아마도 당시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War) 였던 Edwin M. Stanton 이 내린 명령을 뜻하는 것 같다. 스탠튼은 모든 통신선(telegraph line) 에 대한 통제권을 원했으며, 그것들이 자신의 집무실을 거쳐가기를 원했다. 무엇을 보도하고, 보도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그는 편지를 통해 링컨에게 이러한 것들을 요청하였으며, 승인을 받았다. NYtime 에 실린 사설에 따르면, 스탠튼의 집무실을 Nexus of information 으로 표현하였으며, 링컨 대통령 조차도 정보를 얻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자주 들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종래에는(ultimately) 수십명의(dozens) 언론인들을 체포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실 보도 통제, 언론 통제는 대부분의 전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이다. 정치가들은 전선의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민들에게서 감추기를 원한다. 특히 전황이 불리한 때에. 물론 전쟁이 끝나면 이러한 현상은 비판받게 마련이다. 저널리즘의 측면에서, 그리고 어쨌든 정부가 국민들에게서 진실을 감추었다는 핵심이 이것을 비판받을 만한 일로 만든다. 물론 링컨에게도 예외는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딱히 링컨을 비판받아 마땅한 독재자로 만들지는 않는다.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보도 통제는 물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단순히 이것 때문에 인류사에서 전시 상황을 겪은 수많은 통치자들을 모두 독재자라 부르지는 않는다.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 Edwin M. stanton

NYtimes, Lincoln's Surveilance State, by David T. Z. Mindich, July 5. 2013



4. 군대를 투입하여 진압, 100여 명의 시민은 죽고 3천여 명이 부상당했나?


이 사건은 아무래도 이 사건을 말하는 것 같다.


위키피디아, New York City draft riots

http://en.wikipedia.org/wiki/New_York_City_draft_riots


페이지 저자가 다른 소스를 제시하지 않아 이것 이외에 다른 사건이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다소 불분명하다. 하지만 위키백과 설명에 따르면 사망자 120명에 부상자 2000 명이니 제시한 내용과도 얼추 일치한다. 위키백과의 내용을 잠시 읽어보자면....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민병대와 자원병에 대한 몇 가지 정책을 바꾸었다.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은 주로 아일랜드 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노동자 층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에 300$(현재 가치로 5,746$) 를 지불할 능력이 있거나 대신 군대에 갈 사람들을 고용할 능력이 있었던 다른 부유한 사람들이 징병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반발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징병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에는 흑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식으로 양상이 폭력적으로 변하였으며, 구성원에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차지하는 비율도 낮아졌다. 추정에 따르면 약 119 명의 흑인들이 사망하였으며, 당시 Major General 인 John E. Wool 에 따르면 계엄령이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는 계엄령의 선포를 실행할 만한 충분한 병력이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한다. 군대는 소요의 첫날 동안에는 도착하지 않았으며, 그 사이 폭동을 일으킨 군중에 의해 수많은 공공 건물과 교회 두 채, 그 외에도 수많은 노예제 반대론자들의 주택까지 파괴되었다. 또한 44th street 와 5th Avenue 에 있는 유색 인종들을 받아들였던 고아원들까지 파괴되었다. 


폭동의 결과로 도시의 인구 구조가 바뀌었다. 수많은 흑인들이 맨해튼을 떠났으며(그 중 많은 수는 브룩클린으로 이주하였다), 1865년 까지 그들의 수는 10,000 명 이하로 감소하였다.


위키피디아


개인적으로 이거 검색해본 이후에도 이 이슈도 뭐라 더 이상 반박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껴지긴 하는데 그래도 알아본 김에 조금만 더 검색해 보도록 한다. 이걸 과연 그냥 시민의 권리 주장으로 보고 넘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As the July draft approached, New York City was already on edge. A labor demonstration earlier that year had turned violent, as had a protest by the city’s white, largely immigrant dockworkers, who refused to work alongside African-American workers. The two groups, on the lowest rung of the socio-economic ladder, had long jostled for the city’s lowest paying jobs, and tensions had only increased as the war continued.

7월의 징병이 다가오면서 New York City 의 상황은 이미 아슬아슬한 정도로 치닫고 있었다. 도시의 백인들, 특히 부두에서 일하던 이민 노동자은 흑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그들의 데모는 점차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사회 하층민들은 낮은 임금에 오랬동안 고통받아 왔으며 전쟁으로 인해 그 긴장은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중략)

Estimates vary greatly as to the number of people killed in the Draft Riots, though most historians believe around 115 people lost their lives, including nearly a dozen black men who were lynched after being brutally beaten. Hundreds of buildings were damaged—and as many as 50 burnt to the ground—causing millions of dollars in damage. Republican Mayor George Opdyke vetoed the Democratic-sponsored bill providing funds for draft exemptions—but the veto was promptly overturned by the Tammany Hall-controlled city council. In fact, if it were possible for the draft riots to have any “winners,” then the men of Tammany were just that. Their membership had swelled in recent years thanks to their targeting of newly arrived immigrants as their voting base, and their championing of the rights of the city’s workers before, during and after the increased their popularity. Within a decade, they were in firm control of the levers of city government.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폭동에서 희생되었는가, 는 자료마다 상이한 결과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대략 115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수십명의 흑인들이 폭력행위에 노출되었고 목숨을 잃었다. 수백 채의 건물이 파손되었으며, 그 중 50채 가량이 붕괴되었고 수백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났다......(후략)


만약 다른 이슈를 제기하는 소스를 들고 온다면 다시 이야기할 가능성을 남겨두겠다.


내용 출처

위키피디아 - New York City draft riot

History.com - Four days of Fire : The New York City draft riot


5.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제거했는가?


이건 대체 뭘 가지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남북전쟁 상황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1) 노예제 옹호. 노예제를 폐지하겠다는 방침 자체에 반대하거나

2) 전쟁 반대. 남부의 독립은 정당한 것이며 남부의 독립을 지지함


두 부류로 대충 나눌 수 있을 법 한 것 같다. 일단 1) 이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공화당이면 일단 노예제 옹호론자, 설령 흑인 인권에 적대적이었더라도 노예제의 존립 자체에 우호적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북부의 민주당 지지자들 또한 노예제의 존립에 우호적이었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상술했들이, 남부의 Southern Democratic 이 따로 떨어져 나간 이유는 북부의 민주당 지지자들이 pro-slavery action 이 필요하다는 남부측의 입장을 받아들지이 않았던 데 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2) 가 있었을 법도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위키피디아 문서(Timeline of events leading to American civil war)를 참조하면 연방 군대가 공격적이 행동을 취한 것은 1861 년 1월 14일 경에나 나타나 있다. 즉, 그 이전까지 북부는 남부의 연방 탈퇴 행위에 대해서는 뚜렷한 군사적인 제제는 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관리들을 최초로 내쫓은 시점 이후 약 두달여를 실질적으로 그냥 보내주었는데도 지속적으로 적대행위를 하는 편에 대해서 전쟁을 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링컨 대통령은 1861년 3월 4일에 취임하면서도 남부에서 이미 존속하고 있었던 노예제에 대해 간섭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뷰캐넌 대통령 같은 경우는 그 말년에 몰려드는 그를 비판하는 편지에 고생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무슨 편지써서 갈구는 정치 알바가 있었을 가능성도 낮아 보이고.


이런 식으로 누군가가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라고 주장하려면 당연히 일단 주장하는 측에서 소스를 제기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엄연히 그 저변에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페이지의 성향을 감안한다면. 만약 페이지에서 다른 소스를 제기할 의향이 있다면 나는 이 이슈에 대해서 다시 논할 것이다. 내가 역사 전공자도 아닌 마당에 남북전쟁에 관한 모든 소스를 들고 팔 수도 없는 노릇이며, 페이지 작성자가 자기 주장에 정당성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최소한의 출처 제공을 먼저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료 출처

위키피디아 - Timeline of events leading to Civil war

위키피디아 - James Buchanan


6. 대통령 인기투표의 결과는?


개인적으로 지금 이 이슈에 대해서 찾아보고도 상당히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료가 많은 편인데 일단 간단히 보고 넘어가도록 한다. 일단 페이지 작성자가 인기투표라고 했으니 목록에 작성된 수많은 투표 중에 학자에 의한(scholar) 투표는 제외하고 언급하겠다. 또한 최근의 대통령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링컨이 포함되지 않은 투표도 건너뛴다.


C- span poll, 1999 년 1145명 대상

1위 : 에이브러햄 링컨

2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3위 : 조지 워싱턴

4위 : 시어도어 루스벨트

5위 : 로널드 레이건


ABC poll, 2000년 1012명 성인 대상

1위 : 에이브러햄 링컨(19%)

2위 : 존 F. 케네디(17%)

3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11%)

4위 : 의견 없음(10%)

5위 : 로널드 레이건(9%)


Washington College pol, 2005년, 800명 성인 대상

1위 : 에이브러햄 링컨(20%)

2위 : 로널드 레이건(15%)

3위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4위 : 존 F. 케네디

5위 : 빌 클린턴


Gallup poll, 2011년, 1015 명 성인 대상

1위 : 로널드 레이건(19%)

2위 : 에이브래함 링컨(14%)

3위 : 빌 클린턴(13%)

4위 : 존 F. 케네디(11%)

5위 : 조저 워싱턴(10%)


Rasmussen poll, 2007년, 


 대통령 

호감 

비호감 

총계(순위) 

 조지 워싱턴 

 94

 2

 92(1위)

 에이브러햄 링컨

 92

 4

 88(2위)

 토머스 제퍼슨

 89

 4

 85(3위)

 시어도어 루스벨트

 84

 8

 76(4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81

 12

 69(5위)

 (중략)

   
 로널드 레이건

 7

 22 

 50(9위)



이러한 자료 제시는 일단 로널드 레이건을 모욕하고자 함은 아니다. 로널드 레이건은 임기 중에 삽질도 많이 하긴 했지만 강한 미국을 표방하며 어쨌든 공산권과의 대결에서 미국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긴 하다. 그러나...... 이 결과만 보고서도 레이건이 링컨과 1, 2위를 다투는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는 편차가 조금 큰데?


자료출처

위키피디아 - Historical rankings of Presidents of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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